시스템과 일의 취향에 대하여

CPO는 무엇을하는 사람인가요의 후속편을 준비했습니다. 

지방에 다녀올 일이 있었고 그곳에서 퇴임한 공무원 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위치에 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이 수립되었고, 이분은 그곳에 수목을 식재하고 배치하는 업무를 맡으셨다고 합니다. 여러 도시의 비슷한 사이즈의 공원을 참고하시기도 하고 또 수목업자들을 통해서 자문을 구하기도 하신 결과 느티나무와 단풍나무를 심기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이 부지는 그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천의 하류 부분에 자연조성된 삼각주 형태였는데,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하는 하천양안으로 도로가 있었고, 그 도로에는 벚나무가 줄줄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여의도 윤중로를 보고 카피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관련한 조성공사가 시작되었고, 수목을 업자에게 발주하고,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상급자로부터 업무지시가 내려옵니다. 연결된 도로에 벚나무가 줄줄이 심겨져 있으니 여기에도 벚나무를 쭉 이어서 심어야 보기가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이 분은 평소에 벚나무는 가로수목으로도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고 합니다. 벚꽃은 필때는 예쁘지만 별다른 그늘을 만들어 주지도 못하고 수명도 짧아서 관리비용이 들어갈 뿐 아니라, 버찌가 떨어지면서 청소의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상급자의 지시를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공원에는 충분한 그늘을 만들필요도 있고, 또 청소이슈는 비용으로 연결되고 청소가 안되면 민원발생도 많아질것이기 때문에 적합한 수종이 아니라는 이유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조성공사가 진행되는 중에 같은 상급자로부터 또다른 업무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길을 따라 벚나무가 일렬로 조성되어 있으니, 공원의 나무도 그 줄에 맞춰서 가장자리로 심어야 한다는 지시입니다. 이 분은 이번 업무지시도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느티나무는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는 수종이고, 그 뿌리의 크기를 감안하면 그렇게 심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이 업무지시를 거절하기 위해서 수목업자를 동원하기도 해서 원안대로 수목조성공사를 마무리하셨다고 합니다. 

요즘같은 MZ세대 분위기가 아닌 과거 이야이기인만큼 조성공사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해서 딱히 해피엔딩은 아닌 얘기이긴 합니다. 다만 뜬금없이 이 얘기를 가져온 이유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일하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평소 자주 하는 얘기 중에 하나가 빨간펜입니다. 사람들은 빨간펜을 하면서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 회사에 대단한 기여를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급자가 될 수록 빨간펜에 열을 기울이게 됩니다. 빨간펜을 하면서 더 큰 효용감을 스스로 느끼고, 자신의 위치에서의 권력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빨간펜을 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업무로 남아버리는 상급자들이 많습니다. 빨간펜은 그렇게 큰 기여도가 있는 것일까요? 

빨간펜의 나쁜점은 빨간펜을 칠하는 사람의 무효용/무기여에 그치지 않습니다. 빨간펜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빨간펜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모든 것들은 시간이 느려지게 되고 스스로는 완벽한(?) 안을 준비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이제 빨간펜을 해야만 효용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디테일하고 작은것들을 찾아서 빨간펜을 하고 스스로의 효용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고, 더더욱 디테일을 메꿔야 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게 됩니다. 

다들 완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니까 바람직한 경쟁구도가 아니냐는 생각이 혹시 드시나요? 그렇게 해서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 출시해본 경험이 혹시 있으신가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결코 달성하지 못했을 성과였다고 생각하셨던 적이 있으신가요? 비등비등한 제품을 만들어 비등비등한 성과를 내었는데 시간과 에너지와 리소스를 최대한으로 때려넣었다면 정말 바람직한 것일까요? 


게다가 특히, 정말 완벽한 제품을 구상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애자일의 중요한 원칙으로 “우리는 시장을 모른다”를 항상 꼽는 사람입니다. (Agile 12 principle 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시장을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지만, (고객인터뷰 / 시장조사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모른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MVP를 발행하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꼭 시장의 feedback/iteration을 전제로 하지는 않더라도 다음 개발물의 형상이나 확장을 보다 분명하게 알아갈 수 있게 되고, 지속적인 소프트웨어 개발/배포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빨간펜을 한 사람과 당하는 사람은 저 과정을 통해서 시장을 소비자를 제품을 완벽하게 알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신다면 빨간펜이 주는 해악은 쉽게 짐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리더라면 빨간펜을 하는데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지적하지 않을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신다면 본인이 무능력한것이 아닌가 꼭 의심해 보시기 바랍니다. 리더라면 백지에서 먼저 가이드라인을 쳐줄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남들이 열심히 그려온 스케치에 지적질을 하는 것으로 효용을 느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글이 “CPO는 무엇을” 편의 후속인 이유는 이것입니다. CPO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세상 모든 경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다 미리 스케치를 해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위임하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고, CPO가 제품개발프로세스를 책임지고 천착해야 하는 사람인 이유입니다. 

빨간펜을 당해야 하는 나 사람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빨리 빨간펜을 당하고 빨간펜을 쥔 사람이 효용감을 더 낮은 역치에서 느끼고 만족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물론 그 과정은 기분이 나쁠것입니다. 또 그사람으로 인해 자존심을 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내게 월급을 주는 회사에 더 기여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 상급자는 점점 더 무능해 지겠지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품을 출시하고 제품이 하나의 유기적생명체로서 자신의 생명주기를 살아갈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위에 언급된 퇴임하신 공무원 분의 경우처럼 이런 과정에서 아마도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나쁜 평가를 받는다거나 승진에서 배제된다거나 인센티브를 못받을지도 모르지요. 저분께서 평생을 공무원으로 종사하신것처럼 여러분이 이 회사에서 평생을 있어야 한다면 이것은 정말 큰 일입니다. 만약 이 회사에 평생 있으실거라면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말아주세요. 위험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보통의 IT스타트업이 그러하듯 2년 정도면 이직하실 생각이 있다면, 나에 대한 평가는 어차피 현재 회사, 현재의 상사, 현재의 빨간펜러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출시한 제품에 대한 평가는 시장이 하는 것이고, 그런 여러분에 대한 평가는 다음회사가 하게 될테니까요. 

빨간펜을 잘하는 것도 분명히 회사에 기여할수도 있을것입니다. 어느정도는요. 어떤 분야에서는요. 하지만 결국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훨씬 더 큰 해악을 가져오게 됩니다. 빨간펜은 법률적문제, 징벌적문제에 대해서만 그 정당성과 효용성이 충분히 인정됩니다. 이러는 편이 더 낫다거나, 이러는 편이 우리의 디자인가이드를 해치지 않는다거나, 이러는 편이 사용자가 더 편리하다는 정도의 빨간펜은 앞서 미리 백지에서부터 제시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고이 접어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그것은 그 일을 더 고민하는 담당PM과 담당UX가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쓰고 그 성과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리더가 되셔야죠. 그렇지 않으면 고작 빨간펜 몇줄하고 ‘나 아니었으면 어쩔뻔했어’라는 말과 함께 성과까지 가로채게 될테니까요. 


다음 편은 “CS가 탁월해지면 Product이 무능해진다” 입니다. 기대해주세요. 댓좋구알 부탁드립니다 ^^ 아래 Ghost에서 구독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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